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폰다 (문단 편집) == 사생활 == 결혼을 다섯 번 했다. * 첫 번째 아내 마거릿 설러밴은 헨리 폰다와의 결혼이 초혼으로, 폰다와 이혼한 뒤 [[윌리엄 와일러]]와 두 번째 결혼을, 유부녀 [[캐서린 헵번]]과 불륜 중이었던 제작자 릴랜드 헤이워드와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마지막 결혼은 제작자 케네스 웨그(Kenneth Wagg)와 했으며 설러밴의 사망으로 사별했다. * 두 번째 아내 프랜시스 포드 시모어와의 사이에서 첫째 딸 [[제인 폰다]]와 막내 아들 [[피터 폰다]]를 보았고, 피터 폰다의 딸인 손녀 [[브리짓 폰다]]가 있다. 피터 폰다는 회고록 에서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겼다고 밝혔다. 다만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우리를 때린 적은 없고 굶기지도 않았다"며 그런 종류의 학대는 아님을 분명히 했다. 헨리 폰다는 [[우울증]]을 앓던 두 번째 아내 프랜시스 포드 시모어를 두고 수전 블랜처드와 바람을 핀 끝에 아내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혼 신청을 했고, 아내는 그 충격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헨리 폰다는 아내가 사망하고 얼마 안 가 바로 블랜처드와 재혼했다. 몇몇 다른 일화들까지 더해 헨리 폰다는 한동안 [[소시오패스]]로 의심 받기도 했다. 아들 피터 폰다는 아버지 헨리 폰다가 우는 행위를 부정적으로 보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도로 자란 영향 탓인지[*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여전히 [[성경]] 구절을 근거로 들며 우는 건 나쁜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감정에 휩쓸리는 걸 두려워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피터 폰다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자신과 누나 제인 폰다는 장례식장에 가지도 못했고, 그 뒤로 헨리 폰다는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죽은 것으로 자기들 남매를 속였다고 말했다. 아버지 헨리 폰다가 신문이나 잡지 일체를 못 보게 치워버리고 집에서 일하던 고용인들도 어머니에 대해 함구해서 진실을 모르다가 어느 날 누나 제인 폰다가 우연히 잡지에서 기사를 읽고 진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동생 피터 폰다와 공유했다고 한다. 제인 폰다는 헨리 폰다가 엄마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관계가 악화 되었다. * 세 번째 아내 수전 블랜처드는 결혼 당시 21살, 헨리 폰다는 45살이었다. 헨리 폰다와 함께 두 번째 아내 프랜시스 포드 시모어를 자살로 내몬 장본인이나 막상 결혼 후엔 제인-피터 폰다 남매에게 좋은 새엄마가 되어줘서 두 남매 모두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수전 블랜처드는 전설적인 인테리어 디자이너 도로시 해머스타인(Dorothy Hammerstein)의 친딸이자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의 의붓딸로, 헨리 폰다의 두 번째 아내 프랜시스 포드 시모어와 마찬가지로 사교계 명사였다. 그러나 수전 블랜처드는 24살의 나이차, 헨리 폰다의 무관심과 냉정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했다. 나중에 블랜처드는 헨리 폰다와의 결혼생활을 회고하며 자신은 "[[게이샤]]"나 다름 없었다고 회상했다. 피터 폰다는 둘이 이혼하게 됐을 때 통곡했는데, 아예 아버지 곁을 떠나 블랜처드를 따라가려고까지 했었다. 수전 블랜처드는 이후 세 번 더 결혼하는데, 마지막 남편이 [[리처드 위드마크]]다. 위드마크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 했다. * 네 번째 아내 아프데라 프란케티는 남작 지위를 지닌 이탈리아 귀족으로 [[오드리 헵번]]의 절친이었다. 폰다가 헵번과 <전쟁과 평화>를 찍던 중에 헵번의 소개로 알게 돼 결혼했다. 결혼 당시 프란케티는 25살, 헨리 폰다는 52세, 제인 폰다는 18살이었다. * 피터 폰다와 제인 폰다는 헨리 폰다와 성인기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아 함께 모인 인터뷰에서 서로 어색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 말년엔 자녀들과 사이가 좀 가까워졌는지 1978년 헨리 폰다가 [[AFI]] 공로상을 받았을 땐 연설 마지막 부분에서 당시 한창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던 딸 [[제인 폰다]]를 욕하는 사람들을 향해 '''"닥쳐, 제인은 최고니까."'''라고 한방 날려줬다. 아버지의 말에 감동한 제인 폰다의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영상 11:55부터) [youtube(pdCZP_VjxaQ)] * 1981년에 제인 폰다와 <[[황금 연못]]>에 함께 출연하며 화해했다. 사실 화해라기 보단 제인 폰다가 남편과 아버지로서 평생 잘못해온 헨리 폰다를 일방적으로 용서해준 것에 가깝다. 1981년에 마지막 공로상을 받고 1년 뒤인 1982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헨리 폰다의 건강이 많이 악화된 상황이라 제인 폰다가 대신 수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